이들은 일본 사회인 야구선수들로 기업에 소속된, 우리나라로 따지면 실업 야구선수에 해당한다. 그런 팀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겨루었던 것이 바로 82년 한국 야구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일본 사회인 야구 대표팀에게 졌을 때는 '도하 참사'라는 단어가 사용 될 정도의 굴욕이었지만, 82년에는 저런 수준의 일본 대표팀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를 살펴보자.
기사 좌측 하단을 보면 이런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선수들은 밤 늦게까지 카지노에서 노는 일도 있었으나 단 한 선수에 대해서만은 '한국을 이기기 위해서 근신하라'면서 문턱에조차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바로 32세의 우완 스즈끼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노련한 피칭을 자랑하고 있다.
프로도 밟지 못한 사회인 야구선수 32살 우완 스즈끼가 당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였다. 당시 야구팬의 증언에 따르면 스즈끼는 직구 최고 구속이 140km도 나오지 않는 투수였다고 한다. 다른 일본 선수들은 밤 늦게까지 카지노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국 선수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이런 선수들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2. 80년대 프로야구 선수들의 신체 조건과 파워
아래 기사를 보자.
한국인 표준 체격 남자 167cm 몸무게 61kg
이것이 81년 한국 남자의 일반적인 체격이었다.
야구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프로야구 원년 홈런타자였던 김우열도 키가 170 초반에 불과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는 개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김성한, 김봉연, 이만수 등 8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들의 키가 180cm 를 넘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번부터 9번까지 대부분의 타자들이 홈런을 칠 수 있고, 잠실 중단, 상단에까지 쉽게 공을 날릴 수 있는 중심타자들이 버티고 있었던 21세기의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에 비해 힘에서 많이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21세기 KBO의 주요 타자들을 살펴보면,
키도 180cm 이상은 기본이고 몸무게와 체격도 훨씬 좋다.
(이대호, 김태균의 몸무게가 100kg은 아닐것이다.)
게다가 힘 좋은 용병 타자들까지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홈런 타자들의 체격도 살펴보자.
마크 맥과이어
마크 맥과이어
타격은 결국 힘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타자의 힘은 리그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엔 80년대 한국 야구 타자들의 홈런 순위를 살펴보자.
87년
88년
89년
21세기 KBO의 홈런 갯수와 차이가 꽤 많이 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과가 온전히 타자들의 파워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당시의 스트라이크존은 위 아래로 좁고, 양 옆으로 넓은 이른바 '태평양 스트라이크 존' 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타자들이 장타를 생산하기 쉽지 않았던 점도 분명 원인으로 작용한다 (태평양 스트라이크 존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타자들의 홈런 갯수가 현재의 한국 야구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2010년 타자들의 홈런 갯수와 비교해보라.
홈런 갯수뿐만 아니라 80년대에는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들이 정해져 있었던 반면, 현재는 그 누가 홈런을 쳐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큰 차이다.
참고로 박찬호의 전성기였던 00, 01년 NL의 홈런 순위도 보자.
비교하는게 민망 할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장명부, 박철순을 통해 살펴보는 80년대 KBO의 수준
일본리그에서 뛰다 한국에 온 장명부의 통산 기록을 보면 80년대 KBO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한국에 오기 직전인 82년 일본에서의 성적은 3승 11패 111이닝 4.45였다. 그러나 83년 한국에서는 30승 16패 427.1이닝 2.34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준차이가 이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장명부가 첫 해에 엄청난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특이한 투구폼 때문이었다.
장명부의 투구폼을 살펴보면 키킹과 공이 손을 떠나는 타이밍이 다른 투수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구폼이 한국 타자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무지막지한 이닝 소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83 시즌 이후 그의 성적은 급격히 떨어진다.
장명부의 활약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80년대 한국 타자들의 임기응변 능력이 아주 부족했다는 것이다.83 시즌 내내 특이한 투구폼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음 시즌인 84 시즌부터 조금씩 타이밍을 맞추기 시작했다. 선수층이 무척 얇았으며 타자들의 적응력도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22연승을 기록하기도 한 박철순의 마이너리그 기록도 살펴보자
한 때 박철순이 트리플 A에서 메이저리그로 승격되기 직전에 한국으로 왔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박철순의 마이너리그 기록은 더블 A 까지 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처참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간혹 박철순이 마이너리그 시절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며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지 원래 실력은 트리플 A 이상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추신수는 방 2칸 짜리 집에서 동료 커플 2쌍, 부인과 함께 살았으며, 박찬호는 동료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며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박철순의 실패는 실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러한 선수들의 예시로 80년대 KBO의 수준을 짐작 할 수 있다.
4. MBC 청룡의 수석코치 미즈다니의 발언
美國(미국) 에이스빼고도 6勝 1敗
日本(일본)서 한물간 선수 韓國(한국)서 활개
엄청난 수준차 ... 세계타이틀매치 遙遠(요원)
美날고 日뛰고 韓걷다
「美日올스타戰」 계기로 본 3國실력 간접비교
설마 이길것까지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야구태평양전쟁」이랄수 있는 미일프로야구 올스타전(11월 1일~9일 일본)에서 일본은 1승6패라는 전적으로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
35년만에 벌어진 미일간에 이 싸움에 미국은 지난 7월5일의 휴스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출전 멤버중 드와이트 구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로저 클레멘스 및 강타자 마이크 슈미트, 조 카터, 데이브 윈필드, 모스비 등이 불참했다.
반면에 일본은 기요하라 가즈히로(淸原) 와타나베 히사노부(渡邊) 구도 기미야스(工藤) 곽태원(郭泰源) 등 저팬시리즈 우승팀 세이부의 전투수력과 요미우리의 괴물투수 에가와(江川) 및 퍼시픽리그 타격 3관왕 오치아이(落合), 히로시마(廣島)의 강타자 야마모토(山本) 등을 망라한 최강팀을 내놓았다.
(중략)
MBC청룡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씨는 "한국선수들의 실력을 수비 타격 주루등으로 나누어 평가한다면 그중 몇몇 선수는 수비나 주루플레이면에서 일본의 1군실력에 버금가지만 타격까지 포함한 전체실력이 1군에 낄만한 선수는 한명도 없다" 단정한다.
한국의 실력은 일본프로야구의 2군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야구는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태여 비교한다면 일본1군은 미국의 트리플A는 커녕 더블A의 좀 잘하는 팀 실력 정도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수준차이라면 결국 프로야구는 그나라의 수준에 맞게 즐기면 되는것이지 축구에서의 월드컵대회같은 세계타이들매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다.
MBC 청룡의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가 한국야구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기사이다. 결국 미즈다니 코치는 한국 야구와 선수들을 비하한다는 명목으로 퇴출당하게 된다.
미일 올스타전의 경기 내용으로 보아 확실히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더블 A 수준에 불과했다. 90년대 이후 일본 타자들의 힘이 증가하고, 미국 내 야구 인기의 하락으로 유망주들이 풋볼, 농구 등으로 전향하여 메이저리그의 수준이 하락한 이후에야 트리플 A 급으로 인정받은 것이 일본의 프로야구이다.
위 기사의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메이저리그 팀에서는 많은 선수들이 빠져있었고, 일본은 거의 완벽한 올스타를 준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미일 올스타전에 임하는 미국 선수들과 일본 선수들의 몸상태와 마음가짐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수준 차이는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선수들의 실력을 수비 타격 주루등으로 나누어 평가한다면 그중 몇몇 선수는 수비나 주루플레이면에서 일본의 1군실력에 버금가지만 타격까지 포함한 전체실력이 1군에 낄만한 선수는 한명도 없다"
미즈다니의 평가처럼 더블 A 수준에 불과한 일본 야구, 그 일본 야구의 2군 수준이었던 것이 바로 80년대의 한국 프로야구였다.
5. 91년 한일 슈퍼게임
프로리그 출범 이후 완만히 발전하였으나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있던 한국야구. 그런 한국야구에게 굴욕을 안겨주며 급격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대회가 바로 91년 한일 슈퍼게임이다.
한일 슈퍼게임은 일본 프로리그의 올스타와 한국의 올스타가 맞붙은 첫번째 대회이기도 했다. 시합은 총 6차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대회 전 한국 야구인들의 예상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56살 골리앗과 10살 다윗의 대전
초특급 박동희의 몸쪽 낮은 직구에 승부를 건다.
2일 낮 12시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91 한일프로아구 슈퍼게임 1차전을 앞둔 한국팀 김응룡 감독의 출사표다.
출범 10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56년 역사의 일본에 비해 분명히 한수 아래다. 그러나 31일 도쿄에 도착한 김감독은 "시속 1백50km 를 넘나드는 박동희의 강속구를 몸쪽으로 뿌리면 일본 타자들도 쉽게 방망이를 맞추지 못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
(중략)
과연 한국은 이번 6차전 가운데 몇승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후략)
당시 전문가들은 한국야구와 일본야구의 수준차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6차전 중 2승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 낙관론, 선동열 같은 투수가 일본에는 각 팀마다 한 두명 씩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1차전 선발은 요미우리의 에이스 구와타 마쓰미였다. 한국에서는 원래 1차전 선발로 내정되어 있었던 선동열이 발목 부상을 입으면서 박동희가 선발로 등판
(출처 : http://blog.naver.com/hongjoone/140018824281)
1차전은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여 준 경기였다.
구와타 마쓰미의 직구와 포크볼에 한국 타자들은 연신 헛스윙을 하였고, 구와타는 3이닝을 던지고 내려간다. 박동희는 4이닝동안 7피안타 3실점을 한다. 5회 조규제가 등판했지만 홈런 2개를 맞으며 무너진다. 점수차도 점수차지만 경기 내용 자체를 일본 마음대로 조절하는 수준이었다.
2차전 (한국 2 - 8 일본)
1차전 이후 일본의 타선이 조금 달라졌다. 몇몇 주전 선수들이 빠지게 되는데, 1차전처럼 완벽한 올스타가 아니었다.
윤학길이 선발로 등판했지만 홈런을 맞으며 강판당했고, 1차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마무리된다.
3차전 (한국 2 - 5 일본)
일본은 3차전부터 당시 센트럴리그 꼴지팀인 한신 타이거즈 선수들을 주축으로 내보낸다. 한일 슈퍼게임은 양국간의 이벤트 게임이었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송진우가 4타자 연속 삼진을 잡으며 6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한다. 그러나 7회에 동점을 허용하고 구원 투수들이 연이어 점수를 허용하면서 5:2로 패배한다.
"최하위팀에도 역부족"
한신 타이거즈 주축의 팀에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한국 대표팀을 질책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4차전 (한국 7 - 1 일본)
4차전에서 일본은 여전히 부실한 선수 구성이다.
한용덕은 6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한다. 뒤이어 등판한 박동희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세이브를 기록한다. 4차전에서야 비로소 첫 승리를 가져가는 한국 대표팀이다.
그리고 대망의 5차전, 1차전 등판 직전 발목부상을 입었다던 선동열이 선발로 등판한다.
몇몇 야구팬들이 91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동열이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 5차전 등판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5차전에 뛴 일본 멤버들은 오치아이, 다이호를 제외하면 별 볼일 없었다.
5차전 (한국 8 - 0 일본)
선동열은 선발등판하여 5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으며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한다. 뒤를 이어 나온 송진우 역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한다. 장종훈이 기토를 상대로 장외홈런을 치기도 했다.
6차전 (한국 1 - 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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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91년 한일 슈퍼게임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는 2승 4패였지만, 일본이 한국을 가지고 논 대회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물 안 야구> 깨달음 얻었다
한국 야구는 이러한 굴욕을 발판으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일본과의 격차를 꽤 많이 줄였다. 올림픽, WBC를 통하여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와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전을 부정하고, 80년대의 야구 수준이 현재보다 높거나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올드팬들의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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