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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은 대부분의 야구팬들에게 KBO 역대 최고의 선발로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보면 이런 평가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11년간 367경기 109선발 146승 40패 1647.0이닝 68완투 29완봉 방어율 1.20

 

그러나 선동열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정 수준 이상의 리그에서는 선발이 힘든 유형의 투수였다. KBO에서의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부터 선동열이 남긴 기록을 다각도에서 분석해보도록 하자.

 

 

 

1. 선발등판수가 부족한 선동열

 

많은 한국 야구 전문가들이 미국의 '사이영상', 일본의 '사와무라상'에 해당하는 최고 투수상의 이름을 '선동열상' 으로 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사이영은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승, 최다패, 최다이닝, 최다 선발등판 기록을 가지고 있는 투수이고, 사와무라는 어린 나이에 (비록 놀러온것에 가까웠지만) 메이저리그 올스타에게 완투패를 기록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일본야구의 상징적인 투수이다.

 

선동열은 사와무라와 같은 상징적인 투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이영의 경우처럼 기록으로 최고 투수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선동열은 KBO의 최다승, 최다이닝 투수도 아니거니와, 특히 선발 등판수가 아주 부족하다는 것이다.

 


KBO의 역대 선발 등판 20위 안에도 선동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선동열의 KBO 커리어가 무려 11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이상하다.

 

2010년 기준으로 선동열의 선발 등판 횟수는 역대 72위이다 (109선발)

(71위인 랜들의 경우 한국에서 4년동안 113경기를 선발로 등판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기록 비교에 많은 선동열 팬들은 반발할 것이다.

 

"당시의 한국 야구는 특급 투수들이 선발과 구원을 동시에 담당했다. 선동열의 기록도 그러한 관점에서 평가해야 마땅하다."

 

사실 맞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선동열이 풀타임 선발로 활약했던 6년간의 (86~91) 기록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도록 하자.
 

- 86년 -

 

86년 선동열 39경기 22선발 (6위) 262.2이닝 방어율 0.99 

 

86년은 선동열의 압도적인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262.2이닝에 방어율 0.99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선발 등판 횟수도 22번으로 6위를 기록했다. 기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봐도 좋다.

- 87년 -

 


87년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87 시즌 선동열은 86년에 무리해서인지 많은 경기수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한다. 10위권 내에 선동열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87년 선동열 31경기 11선발 (31위) 162이닝 방어율 0.89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한 0점대 방어율을 '선발 0점대 방어율'로 지칭하기는 무리가 있다.

- 88년 -


또 다시 10위권 이내에 선동열의 이름이 없다. 

88년 선동열 31경기 12선발 (31위) 178.1이닝 방어율 1.21

 

87년 단 한번이었으면 모르겠는데 2년 연속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 89년 -

 


89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89년 선동열 36경기 12선발 (27위) 169이닝 방어율 1.17

 

반면 같은팀 이강철은 데뷔하자마자 27번의 선발등판을 기록한다.

 
- 90년 -


90 시즌에도 10위권에 선동열의 이름은 없다.

 

90년 선동열 35경기 16선발 (23위) 190.1이닝 방어율 1.13

 

경기수와 선발등판수가 약간 증가했는데, 44경기 25선발 220.2이닝을 뛴 이강철에게 자극을 받은듯 하다. 그러나 여전히 당시 기준에서 특급 선발로 불리기는 부족함이 있다.

 
 
- 91년 -

  

91년 선동열 35경기 22선발 (8위) 203이닝 방어율 1.55

 

91 시즌 선동열은 22번의 선발등판에 200이닝을 소화하게 되고,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 풀타임 선발로 활약하지 못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선동열은 애초에 선발 로테이션을 지킨다는게 불가능한 투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발 등판 간격을 최대한 늘리면서 중간 중간 구원 등판을 하는 패턴으로 던졌던 것이다. 이런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동열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 내구력과 연투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이닝소화가 힘들었던 투구폼과 직구 위주의 단조로운 투구 패턴에서 기인했다. 전형적인 1이닝 전력투구에 최적화된 투수가 바로 선동열이다.

 

결론적으로 선동열은 KBO의 (슬라이더에 관대한) 몰상식한 스트라이크존이 없었다면 선발로 활약하기 힘든 투수였다.

 

참고 -> 선동열 슬라이더와 변화구의 진실 (http://cafe.naver.com/yakujoa/20404)

 

 

 

2. 최동원과의 경기수 및 선발등판 횟수 비교

 

선동열 팬들은 선동열의 기록을 보면서 아마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선발과 구원을 동시에 나오는 것은 선발 등판만 하는것보다 기록관리가 더 힘들다. 그래서 선동열은 더 대단하다!"

 

일리가 있지만 선동열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경기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기록관리에 아주 수월했다. KBO 최강팀이었던 해태에서 널널한 등판 간격을 이용해 이닝을 적당히 채워가며 방어율 관리를 했다. 말하자면 구색 갖추기식 등판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적절한 비교대상이 있다. 바로 선동열과 자주 비교되는 투수인 최동원이다. 선동열의 6년 (86~91) 과 최동원의 5년 (83~87)의 등판 기록을 비교해보자. (최동원은 88년부터 부상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투수였다)

 

 

선동열                                     최동원

 

86년 39경기 22선발 262.2이닝   83년 38경기 21선발 208.2이닝

87년 31경기 11선발 162.0이닝   84년 51경기 20선발 284.2이닝

88년 31경기 12선발 178.1이닝   85년 42경기 17선발 225.0이닝

89년 36경기 12선발 169.0이닝   86년 39경기 21선발 267.0이닝

90년 35경기 16선발 190.1이닝   87년 32경기 22선발 224.0이닝

91년 35경기 22선발 203.0이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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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34.5경기 15.8선발 194이닝 / 40.4경기 20.2선발 242이닝

 

 

기록관리가 어려운 쪽은 최동원이었다. 막장팀이었던 롯데에서 저런식의 빡빡한 등판으로는 기록관리가 불가능했다. 반면 선동열의 널널한 등판, 특히 정상적이었던 86년과 91년을 제외한 연속 4년간의 (87~90) 등판 기록은 '미달'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87 ~ 90년 선동열 33.3경기 12.8선발 175이닝

 

이런 이유 때문에 선동열과 최동원의 기록은 방어율로 동등비교 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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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의 주무기로 알려진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정도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선동열이 던진 슬라이더는 선동열이 KBO에서 남긴 가공할 방어율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선동열의 슬라이더 품질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평균 구속이 120km 후반, 최고구속이 130km 중반에서 형성되었다. 선동열이 한국, 일본에서 던진 슬라이더의 품질을 살펴보도록 하자.

 
 


 - 129km 슬라이더 - 

- 132km 슬라이더 -

썩 대단한 슬라이더라고 평가하기 힘들다. KBO 최고 수준의 슬라이더를 던진 배영수, 김광현의 슬라이더와 비교해보자. 


- 김광현의 슬라이더 (142km) - 
 


- 배영수의 슬라이더 (142km) -

선동열의 슬라이더와 품질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구속도 그다지 빠르지 않을 뿐 아니라 브레이크가 형성되는 지점도 상당히 앞쪽에 위치해 있었다.
 


한 때 선동열의 팬들 사이에서 슬러브라고 불렸던 화제의 슬라이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평범한 유인구 슬라이더이며, 투수들의 슬라이더를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줌을 당긴 상태로 보여주면 왠만한 공은 이 정도 각도를 보여준다.

 

그 이외에도 몇가지 슬라이더 자료가 더 있지만 공이 미트에 들어갈 때쯤 프레임을 삭제해서 초속보다 종속이 더 빨라보이는 매우 조잡한 조작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 선동열 팬들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선동열의 슬라이더 품질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며, 선동열의 진짜 강점은 슬라이더가 아니라 구위좋은 직구였다.

2. 선동열의 커브 및 기타 변화구

 

선동열의 커브는 크게 신경 쓸 가치가 있는 변화구가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알 수 있다.

 


회전볼 수준의 아주 가끔 사용 할 수 있는 수준의 변화구였다. 다시 말하면, '느린 직구'의 용도였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선동열이 던졌다는 변화구로 '포크볼성 싱커'라는 희안한 구질이 있는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 변화구였다면 일본에서도 선발이 가능했겠지만, 그저 마무리로 던질 때 가끔 쓸 수 있는 변화구에 불과했다.

 
3. 선동열의 신체적 한계

 

선동열은 투수치고는 손이 아주 작은것으로 유명하다. 짧은 손가락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 투수 반열에 오른 인간 승리의 예시로 거론되곤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선동열이 변화구 구사에 선천적인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손이 작으면 고급 변화구의 구사가 힘들다. 선동열이 슬라이더밖에 던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런 신체적 한계 때문이었다. 이는 해태 시절 동료였던 이순철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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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프로야구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선 감독도 나도 뭘 보고 그리 죽자살자 운동을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선 감독의 근성은 예전부터 대단했다. 학창 시절, 심지어 해태에 들어와서까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손가락이 길어서 변화구를 조금만 더 잘 던질 수 있다면 미국이나 일본에도 가볼텐데…."

 

하지만 그는 그 짧은 손가락으로 한국과 일본 무대를 평정했다. (후략)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0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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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짧아 변화구 구사가 힘들었던 선동열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이처럼 선동열은 애초부터 변화구 구사에 한계가 있는 투수였다.

 

 

 

 

4. 선동열의 S-슬라이더와 흑마구

 

그렇다면 선동열은 어떤 원리로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 KBO에서 압도적인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선동열에게는 메이저리그 투수들 못지 않은 엄청난 변화구가 있었다. 바로 'S-슬라이더', 다른 말로는 '흑마구'였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그 의미를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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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의 흑마구가 얼마나 예리했는지 방송 사고가 난 적이 있다.

80년대 한국 프로야구의 야구 중계는 정해진 틀이 있었다. 반면에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는 그 시절에도 벌써 맞춤 중계를 했을 정도로 앞서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S존 같은 시스템이 없었고 홈플레이트 위로 공이 지나가는 장면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런 중계방송 기법을 따라하다 방송 사고가 난 적이 있다.

잠실야구장에서 해태 경기가 있었는데, 선동열이 등판한 경기였다. 선동열이 슬라이더로 루킹 삼진을 잡았는데 타자는 주심에게 불만을 표시했고 이어서 느린 화면이 제공되었다. 홈플레이트를 어거지로 스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설자의 멘트가 이어지는데,

"스트라이크 맞아요. 저 정도로 슬라이더가 예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계진이 홈플레이트 위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준 것이다. 홈플레이트에서 최소한 공 2개 이상 빠진 상태에서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직선으로 포스 미트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30초 정도 침묵이 흘렀고 다시는 홈플레이트 위에서 찍은 영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흑마구 슬라이더의 실체였다. 흑마구가 아니라 (홈플레이트 위가 아니라 흙 위로 지나가는) 흙마구였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 중계방송에서 보여준 흙마구 영상은 방송국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영상이 공개된다면,

장담하는데 인터넷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포털 관계자들은 사업의 발전을 위해 관련 영상을 확보하여 인터넷에 공개했으면 한다. 공개된다면 이건 정말 대박일 것이다. 한국 야구사에서 대 투수들의 서열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그야말로 핵폭탄이라고 보면 된다. 8~90년대 사기 야구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매덕스의 역회전 투심이라든가 노모의 포크볼 같은 동영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대단했다는 선동열의 슬라이더 동영상은 대부분 동일한 동영상들만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트라이크존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유인구 슬라이더 동영상 일색에다, 심지어 선동열 스스로도 가장 공이 좋았다는 일본 시절의 동영상 중에서도 슬라이더 동영상은 찾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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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이 던진 S-슬라이더의 정체는 'Soil Slider' 였다. 홈플레이트가 아닌 흙을 스치고 지나간다는 의미이다. 

 

KBO 시절 선동열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유인구 슬라이더에 너무 관대했던 몰상식한 스트라이크존 때문이었다. 유인구를 스트라이크로 인정해주니 타자들이 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타석에서 저 슬라이더만을 염두하기도 벅찬데, 구위 좋은 직구까지 들어오니 신체조건이 그닥 좋지 않았던 80년대 KBO 타자들로서는 선동열의 공을 치기가 벅찼던 것이다.     

출처 : 야생야사 (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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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대학시절의 진실

야구/선빠계몽서 2011/06/19 01:39 Posted by 용꿍
우리는 앞서 선동열이 고교시절 보여준 투구가 과대평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참고 -> 선동열 고교시절의 진실 (http://www.subalki.com/58)


 

마찬가지로 선동열의 고려대에서의 투구도 상당부분이 과장되어 있는데, 이는 대학시절 알루미늄 배트를 상대로 이틀간 27이닝을 던지는 등 슈퍼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최동원을 의식한 선동열 팬들의 왜곡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선동열이 고려대에서 보여준 모습은 정확하게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1. 선동열 고려대 시절의 발자취

 

 

1981년 춘계리그 준결승 한양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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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는 선발투수로 선동렬을 기용했으나 2회초 한양대 선두타자인 4번 오대석을 데드볼로 출루시킨 뒤 계속해 3개의 안타를 얻어맞아 먼저 2점을 빼앗겼다.

 

출처 : 81년 5월 4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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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선동열은 2회에 들어서자 갑자기 난조를 보이며 난타당하고 2실점을 했다. 이후 당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은 양상문을 투입하여 추가실점을 막는다. 양상문의 호투에 힘입은 고려대는 결국 경기를 역전시켜 최종 스코어 5대 3 승리를 거둔다. 선동열은 이처럼 고려대 시절 난타를 당하게 되면 저학년때는 양상문, 고학년때는 박노준이 구원등판하여 선동열의 방어율을 지켜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같은 패턴이 안 먹힌 경기는 83년 춘계리그 동국대전으로 선동열이 주자 3명을 루상에 두고 강판 당하고 박노준이 등판하지만, 2루타를 맞아 고스란히 선동열의 자책점이 된다. 그러나 그 경기 제외한 대부분의 경기에서 박노준은 선동열의 추가 자책점을 막아주었다.

 

결국 이 경기 부진으로 인해 선동열은 최남수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되고 동기생 이상군이 대학 선발로 한미대학야구에 참가할 동안 선동열은 중학생 수준 고교생들 참가한 81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 대학생 선수로 참가하는 계기가 된다.

 

 

1981년 추계리그 연세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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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고려대의 패인은 투수교체 타이밍을 놓친 것. 역투하던 진동한이 8회말 들어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결승타를 맞은 것이 이 날 승패의 분수령. 고려대가 8회초 힘겹게 1대 1 타이를 만들었으나 상승세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8회말 연세대의 반격에 탈진, 대패를 감수해야 했다. 1학년 투수 선동렬은 1사 2루에서 구원 등판했으나 2사를 잡은 후 이순철에 3루타를 맞으면서 사기가 꺾였다. 세번째 투수 양상문의 구원 또한 때가 늦어 선동렬이 4안타를 맞고 3점을 더 내준 뒤였다.

 

출처 : 81년 9월 23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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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 참가한 선동열의 국내 복귀 직후 모습이다. 선동열 팬들은 선동열이 대학시절 언제나 연세대 킬러였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런 모습도 있었다. 8회에 구원 등판해서 곧장 4안타 3실점을 기록하게 된다. 이런 모습에 최남수 감독은 그 해 정기전에서 연세대 윤학길에게 3대 0 완패를 당하면서도 선동열을 내보내지 않은 것이다. 아마시절 선동열 킬러로 명성을 떨친 이순철의 모습도 보인다.

 

 

1981년 야구대제전

(야구대제전은 당시 고교야구에 비해 성인야구의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대학, 실업 출신의 성인야구 선수들이 고교야구의 유니폼을 입고 뛴 대회)

 

前 서울고와의 1회전 경기. 이 경기는 81년 세계 청소년 대회 MVP 수상 이후 자신감을 가졌으나 고려대 최남수 감독의 불신으로 그 해 대학리그 후반기나 연고 정기전에서 제대로 등판 기회를 잡지 못한 선동열이 자신의 포텐셜을 야구인들 앞에서 마음껏 보여준 의미있는 경기였다. 前 광주일고가 9대 0으로 압승한 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대략 5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호투하였고 당시 경기 해설자와 캐스터도 강속구 투수의 탄생에 기뻐하였다.

 

그러나 첫 경기 호투 이후 기대를 모은채 2번째로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前 부산상고와의 경기에서 고려대 팀선배 곽동찬에게 9회 결승홈런을 얻어 맞고 4대 3으로 패전을 기록하여 아직 설익은 유망주임을 드러낸다. 첫 경기 호투 탓인지 81년 대학리그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도 82년 세계선수권 상비군 대표에 같은 고려대 에이스인 양상문을 제치고 뽑혀 야구팬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1982년 춘계리그 준결승 동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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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동아대의 2년생 박동수는 이날 아우트 코너로 흐르는 교묘한 변화구로 고려대 30타자를 맞아 안타는 단 4개만 허용했고 삼진만 6개를 잡아내 완봉승 투수가 되었다. 이로서 올 첫 대회인 대통령기대회 우승을 포함해 올해 연속 8승을 올렸던 고려대는 9번째 경기에서 1패를 했고 투수성적 4연승을 자랑했던 강속구의 고려대 에이스 선동렬도 1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출처 : 82년 4월 24일 동아일보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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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이 유일하게 대학시절 최동원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가 바로 82년 대통령배 춘계리그에서 4연승을 달리던 순간이다. 그러나 이 또한 동기생 박동수와의 준결승 맞대결에서 패함으로서 기세가 꺾이고, 이후 선동열은 호투와 난타가 비슷한 비율로 섞인 평범한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동수는 선동열보다 먼저 대학리그에 적응하여 1학년 때인 81년부터 대학리그 3관왕을 견인하는 최고 투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듬해까지 상승세를 이어간다. 또한 박동수는 이 대회와 82년 추계리그의 우승까지 이끌며 역시 대학리그 최고 투수로서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준다. 대학리그 대회 중 가장 권위있는 대회는 춘, 추계리그이고 이 해 고려대가 우승한 대통령배와 부산시장기는 토너먼트 대회라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진다.

 

선동열의 팬들은 박동수와 선동열의 이 맞대결을 오늘날 두 선수의 위상으로만 판단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이 때의 선동열은 사정이 달랐다. 즉, 81년 부진한 성적 속에서도 대표팀에 뽑힌 선동열이 야구인들에게 논란이 되었고, 선동열은 호투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진할 경우 언제라도 대표팀 탈락의 고배를 마실 가능성이 있었던 선동열로서는 당연히 박동수와의 맞대결에서도 혼신의 투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82년 백호기 성균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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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고려대가 5회까지 2대 0으로 앞설때만 해도 최감독의 불안은 쓸데없는 걱정처럼 보였다. 그러나 5회말 성균관대 장채근이 고려대 선발투수 선동열의 첫볼을 강타하여 왼쪽 스탠드에 꽂히는 동점 2점 홈런을 날리고 6회말 이연수의 2루타에 이은 조차용의 후속타로 3대 2로 전세를 뒤엎으면서 (후략)

 

출처 : 82년 7월 14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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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리그 준결승에서 패배하고 기가 꺾인 선동열은 바로 다음 경기인 백호기 성균관대전에 선발 등판하는데, 성균관대는 전 해 대학리그 최약체에서 이 해 한희민과 장채근의 보강으로 겨우 중위권에 올라선 평범한 팀이었으나 선동열은 팀의 2대 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5회 장채근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강판 당하여 팀의 역전패에 일조하게 된다. 

 

8번타자 신입생 장채근에게 5회 동점 홈런 맞고 강판당하는 이런 모습들이 대학시절 연승 이후 흔히 볼 수 있었던 선동열의 모습이다.



1983년 춘계리그 동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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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국대는 주무기인 빠른 볼에 다소 자신이 없는듯 투구의 막간을 길게잡는 선동렬을 착실히 공략했다. 점수와는 연결되지 않았지만 1회에 하나, 2회에 2개의 안타로 선동렬을 공략,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국대는 3회 첫타자 강점남 - 백인호가 연속안타를 치며 선동렬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어 김민호, 이건열은 연속 4구를 골라 밀어내기로 선제점을 올리며 선동렬을 물러나게 했다. 1사 만루에 고려대는 왼손잡이 박노준을 투입, 소방투수 노릇을 시켰다. 그러나 동국대 김인식 감독은 왼손타자 유우석 대신 오른쪽 타자 김평호를 대타로 기용했다. 김평호는 박노준의 제 2구를 골라 왼쪽으로 빠지는 주자일소 2루타를 때려냄으로서 3점을 보탰다. (후략)

 

출처 : 83년 5월 11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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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경기로서 선동열이 내보낸 주자들을 안 불러들이고 잘 막아주었던 박노준이 구원에 실패한 경기다. 결과적으로 선동열은 동국대를 상대로 2.1이닝 5피안타 4자책 패전을 기록한다. 또한 이건열에게 밀어내기를 허용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해태시절 동료가 되는 천적타자들의 맹공에 방어율이 폭등하는 선동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다.


1983년 추계리그 건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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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고려에 재역전승

대학야구 5안타 집중 - 선동렬 효과적 공략 4대 3

 

(중략) 이 날 선동렬은 1회말부터 고전을 치러야 했다. 톱타자에게 우전안타를 얻어맞고 난 뒤 그토록 빠른 강속구는 스트라익 존 아닌 타자 몸쪽으로만 휘었다. 2개의 데드볼 1개의 포볼 피안타 2개 그래서 2점... (후략)

 

출처 : 83년 9월 25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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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아시아 야구에서 개인상을 받지 못한 (김용수 우수 투수상 수상) 선동열은 얼마후 추계리그에 참가하여 고교시절 후배였던 차동철과 맞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중상위 전력의 건국대 타자들에게 시작부터 사사구를 남발하며 패전투수가 된다. 이 당시 건국대 라인업에 있던 타자들 중에는 이강돈이 있는데, 당시 무명이었으나 나중에 국가대표도 되고 프로에서도 선동열의 공을 잘 치는 타자로 성장한다.

 

 

1984년 춘계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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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춘계리그 선동열의 조기강판 경기 목록

 

3월 26일 동아대전 0.2이닝 3안타 2실점 패전

4월 1일 한양대전 1회 1실점 후 강판

4월 2일 연세대전 4회 7안타 2실점 후 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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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 입단하기 직전인 84년 선동열은 국내외 대회에서 수세에 몰린다. 84년 춘계리그에서는 무려 3경기를 조기강판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데,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겠다.

 

선동열이 뛰던 당시 대학팀들은 1년에 고작해야 10경기가 조금 넘거나, 강팀도 20경기를 넘기기 어려운 일정을 치루었다. 실제로 82년 2관왕인 고려대도 그 해 16승 3패로 19경기를 치르는데 그쳤다. 대회수는 선동열 1학년 때가 6개, 2학년때부터는 5개였다. 결론적으로 1년에 5대회 20경기 이하를 치루는 대학리그에서 한 대회 3경기를 조기강판 당한다는 것은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선동열에게 비교적 약했던 연세대전마저 3대 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4회에 7안타 두드려 맞고 강판 당하게 된다.


1984년 가을철 대학야구 연맹전 영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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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최우수 선수로는 고려대 우승에 투타 양쪽으로 수훈을 세운 박노준 선수가 뽑혔고 이번 대회에서 완봉승 2게임을 포함해 5완투승을 거둔 건국대 1학년 왼손잡이 투수 김기범은 우수투수가 되었다.

 

선동렬에 이어 박노준을 3회부터 마운드에 올려보낸 고려대는.. (후략)

 

출처 : 84년 9월 22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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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이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치른 마지막 공식경기. 그러나 3회부터 박노준으로 교체된다. 대학시절 3회는 선동열에게 마의 이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선동열의 마지막 대학 공식경기는 2이닝 던지고 마감되었다. 이 때가 해태 유니폼을 입기 불과 반년전이었다. 1학년 투수 김기범이 한 대회 5완투승을 거두어 선동열의 1년치 승수를 쌓는 모습도 확인 할 수 있다.

 

 

- 확인된 선동열의 대학시절 부진한 투구들 -

 

81 춘계리그 한양대전 - 2회에 난타, 2실점 허용 후 강판

81 추계리그 연세대전 - 구원등판해서 이순철에게 3루타 포함 4피안타 3실점

81 야구대제전 前 부산상고전 - 9회 결승홈런 맞고 패전

82 춘계리그 동아대전 - 박동수와 맞대결해서 패전

82 백호기 성균관대전 - 5회 신입생 장채근에게 2점 홈런 맞고 강판

83 춘계리그 동국대전 - 3회 만루에서 이건열에게 밀어내기 볼넷 포함 5피안타 4자책 허용 후 강판

83 추계리그 건국대전 - 사사구를 남발하면서 패전

84 춘계리그 동아대전 - 0.2이닝 3피안타 2실점 패전

84 춘계리그 한양대전 - 1회 1실점 강판

84 춘계리그 연세대전 - 4회 7피안타 2실점 강판

84 가을철 대학야구 연맹전 영남대전 - 3회 박노준으로 교체

 

 

 

2. 선동열이 82년 대학리그에서 12승을 거두었다?

 

선동열은 대학 4년간 82년 대통령배 최우수상을 수상 이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대학리그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선동열 팬들은 82년에 선동열이 무려 12승을 거두었다는 주장을 했다. 선동열 관련 기사에 82년에 12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자세하게 조사해보았다.

 

 

1982년 춘계리그 준결승 동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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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동아대의 2년생 박동수는 이날 아우트 코너로 흐르는 교묘한 변화구로 고려대 30타자를 맞아 안타는 단 4개만 허용했고 삼진만 6개를 잡아내 완봉승 투수가 되었다. 이로서 올 첫 대회인 대통령기대회 우승을 포함해 올해 연속 8승을 올렸던 고려대는 9번째 경기에서 1패를 했고 투수성적 4연승을 자랑했던 강속구의 고려대 에이스 선동렬도 1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출처 : 82년 4월 24일 동아일보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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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서 선동열은 2번째 대회인 춘계리그를 치른 시점까지 4연승을 하다가 1패를 당한다. 이 때까지 선동열의 전적은 4승 1패였다는 것이다.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선동열은 2완투 1구원승으로 3승을 거두었고, 두번째 대회인 춘계리그에서 고려대가 올린 4승의 승리투수는 다음과 같다.

 

 

- 82년 춘계리그 고려대 승리투수 -

 

4월 12일 고려대 동국대전 2대 0 (양상문 완투승)

4월 14일 고려대 인천체전 10대 2 (강상진 진동한 계투, 진동한 승)

4월 16일 고려대 원광대전 6대 1 (진동한 선동열 계투, 진동한 승)

4월 20일 고려대 성균관대전 6대 0 (선동열 완투)

 

전반기 리그 선동열의 성적은 4승 1패 (3완투승)인 것이다. 그럼 이후에 벌어진 대회에서의 성적도 살펴보자.

 

 

- 82년 부산시장기 고려대 승리투수 -

 

5월 25일 고려대 건국대전 3대 2 (진동한 선발, 선동열 2회 등판 구원승)

5월 29일 고려대 성균관대전 7대 4 (고려대 투수 확인 안됨)

5월 30일 준결승 고려대 한양대전 6대 4 (양상문 강상진 계투, 강상진 구원승)

6월 1일 고려대 인하대전 8대 3 (강상진 양상문 계투, 강상진 승)

 

강상진은 2승으로 우수투수상 수상하고 선동열은 미확인 경기 제외하면 1구원승을 챙긴다.

 

 

- 82년 추계리그 고려대 승리투수 -

 

10월 2일 고려대 중앙대전 4대 2 (선동열 8회 등판 구원승)

10월 5일 고려대 인천체전 14대 2 (이효봉 완투승)

10월 7일 고려대 부산산업대전 7대 3 (양상문 구원승, 선동렬 6대 3으로 앞선 7회 구원 마무리)

10월 9일 고려대 원광대전 4대 0 (선동열 완투)

 

 

이후 고려대는 추계리그와 대학 선수권에서 2패를 당해 총 전적 16승 3패를 기록하게 된다. 이 16승 3패 중 고려대의 승리투수가 확인되지 않은 경기는 10번째 승리인 부산시장기 성균관대전이 유일하다.

 

결국 선동열은 확인되지 않은 한 경기 제외하고 18경기에서 10경기 나와 7승 1패 4완투를 기록한게 전부다. 이 성적은 물론 좋은 성적이지만 역대 국가대표 에이스들에 비해 독보적인 성적이 절대 아니다.

 

선동열의 대학시절 한 대회 최다승은 82년 대통령배 3승이 최고인데, 이 또한 한 대회 4,5승을 밥먹듯이 올렸던 최동원 등의 투수들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리고 위의 승리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승이 드문드문 있어서 어지간한 에이스라면 저정도 등판간격으로 저런 성적을 거두는게 어렵지 않았다. 완투승도 고작 4승이고, 이 중 강팀을 상대한 것은 인하대와 한양대, 2경기 뿐이었다.

 

아무튼 선동열의 82년 대학리그 승수는 확인된 7승 이외에 미확인된 1경기에서 선동열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가정해도 고작 8승이다. 또한 그 경기는 시간 제한이 걸려 이틀간 벌어졌으므로 고려대 측 투수는 여러명의 투수가 나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완투가 아닌 2승을 거둔 강상진이 이 대회 우수투수상을 받은 것을 감안했을 때 선동열이 승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82년 대학리그에서 선동열이 12승을 거두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추가적인 근거를 찾기 위해 다른 대회를 알아봤다. 우선 정규리그가 아닌 백호기. 그러나 이 대회에서 고려대는 1회전 탈락하여 이 대회 승수는 아니란걸 알아냈다. 이 대회 경기결과는 다음과 같다.

 

 

1982년 백호기 성균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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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고려대가 5회까지 2대 0으로 앞설때만 해도 최감독의 불안은 쓸데없는 걱정처럼 보였다. 그러나 5회말 성균관대 장채근이 고려대 선발투수 선동열의 첫볼을 강타하여 왼쪽 스탠드에 꽂히는 동점 2점 홈런을 날리고 6회말 이연수의 2루타에 이은 조차용의 후속타로 3대 2로 전세를 뒤엎으면서 (후략)

 

출처 : 82년 7월 14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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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폈듯이 이 대회에서 선동열은 장채근에게 동점 홈런 맞고 팀의 역전패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백호기에서 1승도 추가하지 못한 선동열이 어디서 12승을 채웠을까? 어거지로 국제 대회인 82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따낸 3승을 더해도 12승에는 모자란다.

 

그 답은 3월에 서태평양 대회라는 친선대회가 있었는데 선동열이 이 대회에서 호투했다는 기사가 있다.

 

정규 대학리그 7승 (MAX 1승) + 국제대회 3승 < 12승

 

결국 한미대학야구도 아닌 서태평양 대회라는 국제 친선경기에서의 승리까지 어거지로 끌고와야 겨우 12승이 맞춰진다는 사실이다. 선동열이 대학리그에서 12승을 거두었다는 주장을 어떤 기자가 했는지는 몰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승수를 세는 것은 말도 안된다.

 

 

 

3. 선동열이 대학리그에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선동열 팬들은 82년 대학리그 12승 주장에 그치지 않고, 선동열이 대학리그에서도 4년 통산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증명 가능하다. 선동열이 두들겨 맞은 경기에서의 자책점만 확인해보자. 자책인지 비자책인지 정확하지 않은 경기는 선동열에게 유리하도록 제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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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춘계리그 한양대전 : 2회 3안타 2실점 강판 (1이닝 2자책)

81년 추계리그 연세대전 : 8회 1사 2루에서 등판 등판 아웃카운트 하나 잡고 4안타 3실점 후 강판 (1/3이닝 4자책점) 

82년 춘계리그 동아대전 완투패 (8이닝 2자책)

83년 춘계리그 동국대전 : 3회 1사후 만루에서 밀어내기 1실점 후 강판 구원 박노준 주자일소 2루타 허용으로 2.1이닝 4자책

83년 추계리그 건국대전 : 차동철과 맞대결 4실점 완투패. 집중 5안타 허용하고 무너짐 (8이닝 4자책)

84년 춘계리그 동아대전 : 1회 2사후 3피안타 2실점 후 강판 (0.2이닝 2자책)

84년 춘계리그 연세대전 : 4회 7안타 2실점후 강판 (아웃카운트 안 나와있으나 선동열에게 유리하게 3.2이닝 2자책)

 

84년 춘계리그 한양대전도 1회 1실점후 강판하였으나 자책점 여부 알 수 없어 제외.

그 이외 호투한 경기에서의 실점 모두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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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확인된 경기만 해도 24이닝 20자책점이다. 이 20자책점을 0점대 방어율로 만회하려면 무려 156이닝 이상을 무자책으로 막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선동열이 가장 많은 승수를 올렸던 82년 조차 고작 7승이고, 그 7승 중 4승만 완투이고 나머지는 구원승이다. 결국 선동열에게 유리하게 82년 완투한 4경기를 모두 완봉이라고 가정해도 고작 50이닝 정도이다.

 

81년은 선동열이 2이닝을 넘기기도 어려운 시절이었고, 83년 대학리그는 최고 성적을 낸 투수 박노준의 승수가 고작 5승이다. 83년 선동열이 50이닝 이상을 무자책으로 막으려면 완봉승이 6경기는 나와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해 최고 성적의 박노준이 5승에 1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기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84년은 춘계리그에서만 3경기 조기 강판을 당했던 선동열이 그 해 5승을 넘게 올렸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선동열은 춘계리그에서 1완투, 추계리그에서 2승 정도가 확인되었을 뿐이다.

 

결국 선동열의 대학 4년간 승수가 20승에 못 미치는건 확실하며, 아무리 선동열에게 유리하게 계산해보아도 방어율이 0점대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선동열이 승리한 경기에서도 83년 추계리그 연세대전 이순철의 그라운드 홈런 등으로 실점한 경기가 숱하게 있는데 0점대 방어율이 가능할 리가 없다.

 

 

 

 

4. 선동열이 대학리그에서 부진했던 원인

 

선동열의 대학시절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선동열의 하드웨어가 이미 대학생 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최고 구속은 154km 였으며, 프로에 들어와서는 마무리 전향 이전까지 이런 구속을 기록한 적이 없다. 선동열의 프로 선발 시절은 대학시절보다 오히려 구위, 구속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대학시절에 알루미늄 배트를 든 대학 타자들에게 숱하게 난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선동열은 대학시절에 국가대표 역대 에이스 누구보다 많은 조기강판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경기 초반부터 도망가는 피칭으로 볼넷을 남발하다 결국 투구수가 많아져서 마운드에서 일찍 내려오게 된 탓이다. 이 때 대학타자들이 선동열을 공략하는 방법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타석 안쪽에 붙어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고, 몸쪽 제구력이 떨어지는 선동열의 약점을 이용하여 최대한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것이다. 배트를 짧게 쥐는 타법으로 부족한 파워를 보충하고, 선동열로 하여금 많은 공을 던지게 하여 그를 조기강판 시켰다. 결국 대학리그 타자들의 이런 영리한 공략에 선동열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핵심은 이런 공략법이 알루미늄 배트를 들었을 때 가능했다는 것이다. 가볍고 비거리가 좋은 알루미늄 배트의 위력에 변화구 구사력이 떨어지는 선동열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선동열이 대학시절 난타당한 기록들을 보면 그 기간이 상당히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동열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이다. 차라리 특정 기간에 편중되었다면 컨디션이나 부상 탓으로 돌릴 수 있으나 이렇게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동열이 3경기를 강판당한 84년 춘계리그에서도 인하대전 완봉승을 거두었고, 건국대에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83년 추계리그 때도 연세대전은 1실점 완투로 위력적인 투구를 했던 것이다.

 

변화구 구사력과 제구력이 부족했던 선동열에게 알루미늄 배트를 든 대학 타자들은 악몽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프로에 와서 기록관리가 가능한 최강팀 해태의 소속이 되어 대학시절 천적들이 모두 동료가 되고,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에 몰상식할 정도로 관대한 스트라이크 존에서 나무배트를 든 타자들을 만나면서 선동열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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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고교시절의 진실

야구/선빠계몽서 2011/06/18 01:23 Posted by 용꿍


선동열의 고교시절에 관해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 몇가지 있다.

 

1. 선동열은 타고난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고교시절부터 큰 노력 없이 최고가 되었다.

2. 선동열은 고교시절부터 비교 대상이 없었던 압도적인 에이스였다.

3. 선동열은 고교시절부터 혹사를 당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하드웨어를 타고나지도 않았고, 고교시절 압도적인 에이스도 아니었으며, 혹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부터 선동열이 고교시절 보여준 모습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1. 선동열의 성장기를 증언하는 전문가들

 

아래는 선동열의 은사인 前 광주일고 감독 조창수 및 주변인 김창현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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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일요신문

 

선 감독의 광주일고 시절 감독을 맡았던 조창수 현 대구 경북고 감독은 선 감독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가냘픈 몸매에다 여드름 투성이였다며 지금이 훨씬 부드러운 인상이었다고 말했다.

 

"몸이 굉장히 유연했다. 공 던지는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할 정도로 온몸의 밸런스가 뛰어났다. 중학교 때만 해도 별 볼일 없었지만 고 2때부터 자질 보이기 시작하더니 고 3때부터 좋은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당시 야구부장으로 재직하며 선동열 감독을 가까이서 지켜본 김창현 전 광주교육대 총장은 선 감독보다 부친 선판규씨에 대해 감탄을 넘어 감동했다고 한다.

 

"매일 오후 3시 정도 되면 선 감독 아버님이 운동장에 나와선 다른 선수 몰래 아들에게 보약을 먹였다. 선 감독이 국보투수가 된 배경에는 이런 부모님의 정성과 부유한 환경이 한 몫했던 것 같다."

 

특히 선 감독은 오전 수업에 단 한번도 빠지지 않으며 모범생 이미지를 쌓았는데 학교 성적은 운동에 몰두하느라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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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가 아는 대기만성형의 대표선수인 장종훈, 박정태 같은 선수들도 스타로 발돋움한게 성인 이후일 뿐 사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지역 야구인들에게는 유망주로 각인되던 선수들이다. 굳이 예외를 들자면 한용덕과 롯데 김민호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동열은 무려 고 2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유망주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선동열은 타고난 하드웨어를 가진 선수가 아니었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유연성을 가지고도 야구에 뒤늦게 소질을 보인것은 그의 타고난 파워가 약했기 때문이며, 부친의 물량투입과 본인의 노력으로 키와 몸무게가 늘면서 야구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선동열은 타고난 하드웨어로 다른 선수들보다 노력을 적게 하고 대성한 선수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보통 선수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후에야 유망주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다만 유망주에서 스타로 발돋움하는 기간이 다른 선수들보다 짧다는게 특징일 뿐이다. 고 2때 가능성을 보이고 고 3때 스타가 되었으니 말이다. 

 

 

2. 선동열의 고교시절 발자취

 

그렇다면 과연 선동열이 고교시절 보여준 피칭은 어느정도 수준이었을까? 일부 올드팬들의 말처럼 과연 적수가 없는 압도적인 에이스였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1979년 황금사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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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79년 10월 02일 경향신문

 

제 33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고교야구 쟁패전 이틀째 경북고는 5회 초 6번 김성래의 3점 홈런 등 10안타를 터뜨려 광주일고를 9대 4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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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는 고교시절 선동열로부터 홈런을 빼앗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고, 그래서 찾아낸 기사가 바로 이것이다. 선동열이 김성래로부터 홈런을 맞았다는 직접적인 내용은 없지만, 선동열은 이 경기에서 팀 5번타자로 출전했고 김성래가 홈런을 기록한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김성래의 증언은 사실로 보여진다.

 

 

1980년 대통령배 결승전 (선동열 MVP 수상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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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80년 05월 02일자 8면

 

광주일고는 에이스 선동열 대신 광주상에 강한 차동철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적중 6회까지 광주상 타선을 단 2안타로 묶으면서 순탄하게 게임의 실마리를 풀었다. 광주일고는 선동열이 올봄 지역대회에서 광주상에 2패를 당하는 등 열세를 보였으므로 광주상을 잡아낸 경험 있는 차동철을 먼저 마운드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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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팀이 8대 2로 앞서고 있는 7회에나 마운드에 오른다. 80년대 고교야구 대회에서는 에이스가 대부분의 이닝을 던지는게 상식이었으며, 82년 대통령배 김종석이나 87년 청룡기 구대성처럼 5경기를 모두 완투하여 우승을 시키는 경우도 흔했다.

 

반면 팀 에이스가 특정팀에게 2연패를 당한 징크스를 이기지 못하여 2학년 투수가 결승전 선발로 나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선동열이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배 예선 2회전에서 광주일고는 이 해 최강이었던 선린상고를 꺾는데 이 경기의 선발 투수는 선동열이 아니었다.

 

 

1980년 대통령배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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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80년 04월 26일 경향신문

 

(중략) 에이스 선동열 대신 광주일고 선발투수로 기용된 차동철은 스피드가 뒤졌지만 다양하게 볼을 던지면서 선린상 타선을 단 4안타로 막아 선린상의 추격을 5대 1로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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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어 선린상고 사냥에서 3학년 에이스 선동열이 아닌 2학년 차동철이 완투를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언론에서도 선동열의 이 대회 MVP 수상을 지적한다.

 

 

선동열의 1980년 대통령배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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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80년 08월 10일 조선일보 11면

 

(중략) 대통령배 대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승팀 광주제일의 선동열 투수가 MVP상을 받고 타격, 최다안타, 최다타점, 도루, 수훈상 등 5관왕이 된 허세환을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난센스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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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최강팀이었던 선린상고와 광주상고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를 거둔 차동철도 아니고, 비교적 약체였던 충암고전 등에서 호투한 선동열이 MVP를 수상한 것에 대해 '난센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당시 기사다.

 

또한 80년 황금사자기 준결승에서는 광주일고가 천안북일고를 이기는데, 이 경기 역시 선동열은 경기 후반에 나와서 마무리를 하고 대부분의 이닝을 차동철이 던진다. 결국 그 해 광주일고가 꺾은 가장 강한 세 팀인 선린상고, 광주상고, 천안북일고와의 세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끈건 선동열의 후배인 2학년 차동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동열이 봉황대기에서 기록한 노히트노런 상대는?


 

그 상대는 바로 경기고였다. 경기고는 이동현의 활약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한 2000년 이전까지 만년 최약체였던 팀이다. 이런 경기에 선동열 같은 초고교급 투수가 나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어쩌다 나와도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잠깐 던지다 내려가지 선동열처럼 끝까지 완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상하위 팀간 전력차가 극심했던 80년대 고교야구에서 조계현, 조규제, 지연규와 같은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들이 최하위팀을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기고 같은 팀들은 연습 상대도 안되는 전력이므로 강팀들은 보통 콜드게임으로 이기곤 했는데, 선동열은 이런 경기고를 상대로 완투를 하여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약팀을 상대하여 호투를 이어가던 선동열은 드디어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강팀인 선린상고를 만나 선발등판하지만 박노준에게 4타수 3안타에 홈런까지 맞으며 5실점 패전투수가 된다.

 

당시 황금사자기 결승전을 보았던 야구고수의 증언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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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경기 시작 후 성인리그 선수들 직구 최고구속 130km 중반 잘 넘지 않던 시절 탄사 자아내기 충분한 위력적인 볼 뿌려댄다. 그러나 그런 호투는 4회 들어 1실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여 6회 2대 1로 앞서던 광주일고 리드는 박노준 동점타와 유지홍 역전타로 경기 뒤집힌다. 그리고 운명 8회 박노준은 전타석 동점타 이어 쐐기 박는 2점 홈런 날려 선동렬을 무너뜨린다. 선은 전날 천안북일고전 후반 몇이닝 던진게 피로한지 후반 갈수록 힘 잃어갔다.

 

최종 스코어 선린상고 5대 3승. 이 경기로 선린상은 그 해 최강 군림하고 박노준은 고교야구 최고 스타로 발돋움한다. 반면 그 해 최강팀 선린상고 천안북일 광주상고 격파한 차동철보다 적은 이닝 던지며 인상적인 활약 못한 선동렬은 강팀 격파할 기회 얻었으나 극복 못하고 큰 경기 약한 징크스 서막 알리는 경기가 이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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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팀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강팀과의 대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선동열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결국 선동열이 고교시절에 보여준 모습은 감독이 혹사를 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에이스의 모습도 아니었거니와, 광주일고의 실질적인 에이스는 선동열의 1년 후배 차동철이었다.

 

 

 

3. 고교시절 선동열의 라이벌 김태업의 증언

 

현재 야구팬들의 생각과는 달리 선동열의 고교시절 라이벌로 언급되곤 했던 이상군이나 김태업의 당시 인기는 선동열을 가뿐히 넘어섰다.

 

김태업은 투타를 겸비한 만능 스타로 선동열보다 훨씬 먼저 이름을 날렸고, 고 3때 부상 후유증으로 투수로서의 평가는 선동열보다 아래였으나 잘생긴 외모로 인해 인기는 선동열보다 더 뛰어났다. 그 김태업이 최근 인터뷰를 통해 80년 대통령배 결승전 패인에 대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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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nate.com/view/20100629n10530


(중략)

 

내가 중학생으로는 최초로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홈런을 쳐부렸잖아. 그때 투수가 누구일 거 같아? (입꼬리를 올리면서) 3학년 때인데, 선동열이었어. 그날도 사실 내가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데도 학교에서 공을 던지게 하더라고. 타격에서 중요한 게 허리인데, 투구로 허리를 풀 게 한 거지. 그러고 보면 내가 동열이 공은 잘 쳤어. 고등학교 때는 지역예선에서 연타석 홈런을 친 적도 있으니까.





전남고로 진학할 때나 전남고가 해체해서 광주상고로 갈 때도 피신을 다녔지.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부쩍 자라면서 전국에 내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한 것도 있어서, 서울에서 스카우트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들이 내려왔어. 그래서 팔자에도 없이 한 달 정도 남해안의 섬에서 생활했어. 그때도 조건 같은 것도 모르고, 그냥 감독님이 추천해준 곳이 전남고였으니까 가야 된다고 생각한 거여.

 

전남고가 해체되고 광주상고에 갈 때는 정말 난리가 났어. 그때는 한 2달 정도 피신해 있었어. 1학년(78년) 때 봉황대기에서 당시 고교 최강이던 신일고를 상대로 6피안타 완봉승을 거두어 부렸잖아. 게다가, 9회 말에 끝내기 안타도 치고. 후에 들은 얘기지만, 한동화 당시 신일고 감독이 나를 걸러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김)정수 형(전 MBC, 작고)이 승부한 거더라고.

 

사실 다들 신일고가 콜드게임으로 이길 거로 생각한 경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주목을 크게 받았지. 우린 1학년이 주축이었고, 신일고는 김정수 형, 양승호 형, 김경표 형 등 쟁쟁한 멤버들이었거든. 경기 전에 연습할 때 (김)정수 형 볼이 정말 빠르더라고. 그래도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몰랐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신일고가 세다든지 하는 생각을 전혀 안 했어. 오히려 우리가 최강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했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거지 (웃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라운드

 

광주상고에 가서는 처음에 후회했어. 그때 이한구 감독님이었는데, 내가 야구를 하고 나서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한 적도 없어. 중학교 때도 많이 했지만, 그건 비교도 안 됐어. 합숙훈련하면 한밤중이 되어서야 ‘오늘 운동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운동을 많이 시켰어. 또 기술적으로도 많이 아셨고. 이 감독님이 광주상고에 잠깐 계셨는데, 계속 있었으면 우리가 우승을 몇 개는 더 했을 거여.

 

광주상고가 2학년 때인 봉황대기 때 우승을 차지했는데, 윤여국 선배가 혼자 다 던졌지. 나는 부상으로 못 나갔어. 나 혼자 예선부터 다 던졌어. 그때는 참말로 밥만 먹여주면 던졌어. 그러다 보니까 발목도 아팠고, 팔꿈치에도 무리가 왔던 거야. 요즘처럼 거짓말로 아프다고 하면서 몸 관리하는 게 어디 있어. 아파도 던지고 싶어서 안 아프다고 하고 던지는데. 멍청한 짓이었지 (웃음). 프로야구도 없었고, 실업에 가도 27, 8세가 되면 다들 은퇴하고 그랬잖아.

 

(선)동열이는 고등학교 때도 슬라이더를 잘 던졌는데, 나는 오로지 속구로 승부했어. 그때는 스피드건도 없어서 몇 km/h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강속구를 던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중학교 때 강 감독님이 “너는 일본에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 백인천 선배님이 일본 프로야구에 갔지만, 병역 문제도 있어서 그 길이 안 보였던 시대였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아. 1980년이라는 시대상황만 아니었다면, 내 야구인생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마수걸이인 대통령배에서 광주일고랑 결승에서 만났어.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광주팀끼리 결승에 오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지역예선에도 광주일고 매번 이긴 것도 있어서 우리가 우승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근데 예상과는 달리 광주일고에서 선동열이 아니라 (차)동철이가 선발로 등판했는데, 경기가 꼬이더라고. 2:8로 졌어. 결국에는 학생야구에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팀워크나 정신력이 더 중요한 것 같아. 우리는 학교 관계자를 비롯해 우리 선수들까지 다들 경기도 하기 전에 김칫국부터 마셨거든. 우승했다고. 우리 멤버 대부분이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경기 경험도 많았고 실력도 좋았지만, 정신력의 차이가 점수로 나타난 거지.(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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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업의 증언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전에 선동열은 광주일고 재학시절 이순철에게 맞은 홈런이 야구를 시작한 이래 최초의 피홈런이라고 밝혔으나 김태업은 이미 중학교 때 선동열로부터 홈런을 뽑았다고 한다.

 

또한 80년 대통령배 결승의 패인을 "근데 예상과는 달리 광주일고에서 선동열이 아니라 (차)동철이가 선발로 등판했는데, 경기가 꼬이더라고." 라고 밝히고 있다. 지역예선에서 두 번이나 이겼던 선동열이 안나오고 차동철이 선발 등판한 것이 패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선동열은 고교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실제로 중요한 경기에서는 상대였던 광주상고 타자들이 선발로 나와줬으면 하는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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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구속의 진실

야구/선빠계몽서 2011/06/17 10:35 Posted by 용꿍


선동열의 직구와 슬라이더 구속은 야구팬들에게 많이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특히 선발 시절의 구속이 완투 기준으로 직구 평속 147km 이상, 슬라이더 평속 135km 이상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야구팬들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선동열의 구속은 보통 어느정도에서 형성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선발투수 선동열의 직구 평균 구속

 

현재 알려진 자료들 중 선동열의 선발 시절 직구 평균 구속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는 바로 91년 한국시리즈 1차전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1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완투승을 기록한 선동열의 구속이 자세히 나와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경기 내내 143~145km를 유지했으며 최고 구속은 150km, 최저 구속은 136km"

 

평균 직구 구속이 약 144km 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속을 선동열의 일반적인 선발 직구 평속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무대가 한국시리즈 1차전 때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등판해서 기록한 구속을 시즌 평균 구속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떤 선동열 팬은 이 경기에서 선동열이 9이닝 동안 150개의 공을 던졌다는 것을 근거로, 시즌 평균 구속은 144km 보다 오히려 3~4km 빠른 147~148km 였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이 터무니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클리프 리의 직구 평균 구속 자료를 찾아보았다.

 



클리프 리의 2010 시즌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은 91.3마일 (146.9km) 였다.


그러나 2010 시즌 디비전시리즈 1차전 패스트볼 구속은,

 

포심 패스트볼 : 89.64마일 / 7구

투심 패스트볼 : 92.59마일 / 75구

 

평균 92.33마일 (148.6km) 로 시즌보다 구속이 더 빨랐다.


이어진 디비전시리즈 5차전에서는 9이닝 동안 120개의 공을 던지며 92.22마일 (148.4km) 를 기록한다. 이 역시 시즌 평균 직구 구속인 147km 보다 더 빠르다.

 

만약 누군가가,

 

"9이닝 동안 120개의 공을 던지며 148km가 넘는 평균구속을 기록한 클리프 리의 시즌 평균 구속은 150km 이상!"

 

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91년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는 사실이다. 정규시즌 종료 후 곧바로 진행되는 디비전시리즈와는 달리, 선동열은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기간 (약 2주)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한 평균 구속이 약 144km 였으니, 정규시즌에서의 직구 평속이 140km 초반이었음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자료 하나를 보고 가자.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039&path=|190|&leafId=396

 

이렇듯 선동열의 선발 중심 구속이 140km 초반이었다는 것은 야구인들이 증언하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91년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 직후 인터뷰를 보면 선동열 스스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 한국시리즈 커리어의 처음이자 마지막 완투승을 거두었음을 감안할 때 전혀 신빙성이 없다.
 


그래도 정 믿지 못하겠다면 선동열이 마무리로 등판한 경기 하나를 감상해보자.


 

 
 

144km (직구)
144km (직구)
142km (직구)
145km (직구)
143km (직구)
143km (직구)
146km (직구)
145km (직구)
144km (직구)
146km (직구)
147km (직구)
145km (직구)
147km (직구)

평속 : 144.7km

선동열의 98년 6월 7일 등판경기이다. 총 13구를 던졌는데 모두 직구이고, 평균 구속은 144.7km 이다. 자료에 나와있는 98년 직구 평속 143.8km 와 큰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자료의 신뢰도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선동열의 일본 NPB 시절 구속이 KBO 시절에 비해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는데, 선동열이 93, 95 시즌에 마무리로 던진 구속은 NPB 96, 97 시즌의 구속과 거의 비슷했음을 알려둔다. 

3. 21세기 선발투수들과의 구속 비교

우리는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 선동열의 선발 직구 평균 구속이 140km 초반, 마무리 평균 구속이 140km 중반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구속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야구팬들을 위해 21세기 KBO의 선발투수들과 직구 평속을 비교해보도록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좌완투수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의 09년 시즌 도중 집계 된 구속 자료이다. 세 투수 모두 직구 평속이 142km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선동열의 선발 직구 평속과 비슷하거나 약 1km 빠른 수준이다. 그러나 세 투수가 좌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3~4km 정도의 차이다. 참고로 우완 투수인 윤석민의 직구 평속은 약 144km다. 선동열이 시대를 앞선 구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21세기 KBO의 에이스들보다는 구속이 느리다.

4. 메이저리그가 구속을 뻥튀기한다?

실제로 많은 한국 야구팬들이 믿고 있는 이론 중 하나가 메이저리그 구속 뻥튀기 설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측정되는 구속은 대부분 실제 구속보다 3~4km 빠르게 측정되고, 그러므로 메이저리그 투수들과 한국 투수들의 구속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깜짝 놀랄만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선동열과 박찬호의 구속차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자주 이용되기도 하는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아래 기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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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 왜 더 빠를까? 실밥이 착착 감겨!


용병들 스피드 2~3㎞ 향상 "손끝 걸림 좋다" 이구동성… 마운드 높이·스피드건 무관

이유가 뭘까.

한국에 오면 외국인 투수들은 대체로 스카우팅 리포트에 적힌 최고구속보다 2, 3㎞는 더 빠른 공을 던진다. 그레이싱어(요미우리)는 2005년 7월14일 국내무대 데뷔전에서 최고 152㎞를 던진 뒤 스스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그레이싱어는 최고 145㎞를 던지는 기교파”라고 돼 있었다.

 

KIA 새 용병 디아즈(28)가 19일 광주 LG전 3회초 8번 김정민의 타석 때 3구째 152㎞ 짜리 직구를 던졌다. KIA 스카우팅 리포트에 디아즈의 최고구속은 147㎞로 기록돼 있다. 디아즈는 일본에서 뛰었던 2006년에는 최고 150㎞를 기록했다.

 

▲ 실밥 덕분

 

디아즈는 경기 후 “공이 작고 실밥이 도드라져 던질 때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한국의 공인구(맥스, 스카이라인, 빅라인 제품)는 둘레 22.9~23.5㎝에 무게는 141.77~148.8g이다.

미국의 공인구(롤링스사 제품)는 둘레 22.86~23.5㎝에 무게는 141.75~148.83g, 일본의 공인구(미즈노 150)는 둘레 23.2㎝에 무게는 145g이다. 과거에는 한국의 공인구가 미국 일본의 공인구에 비해 작고 가벼웠지만 지난해부터는 거의 같다. “작은 것 같다”는 디아즈의 말은 그저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의 공인구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실밥의 폭이 약간 좁고 도드라진 것은 사실이다. 공의 표면은 한국이나 일본의 공인구는 비슷하고, 미국 것이 덜 미끄러운 편이다. 그레이싱어는 한국 공인구에 대해 “포심 패스트볼은 물론이고 슬라이더나 체인지업 등 변화구를 던질 때도 긁히는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 마운드와 스피드건 이점은 NO

 

그레이싱어가 첫 선을 보일 때만 해도 한국의 마운드 높이는 13인치로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3인치나 높았지만 지금은 10인치로 같다. 또 스피드건도 한국 구단 대부분이 미국산인 ‘스토커’ 또는 ‘저그스’를 사용한다. KIA 조찬관 스카우트 차장은 “과거에는 공과 마운드 어드밴티지 덕분에 용병들이 한국에 오면 기본적으로 4, 5㎞ 이상 스피드가 더 나왔지만 요즘은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용병들이 미국에서는 컨트롤 위주의 피칭을 하다가 한국에 오면 파워 피칭으로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도드라진 실밥과 더불어 스피드가 더 나오는 원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출처 :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6/h20080620211339918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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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미국에서 온 용병들이 한국 리그에서 구속이 더 잘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한국리그에 와서 구속이 증가한 케이스는 비단 용병 투수들만이 아니다. 이상훈이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에서 뛸 당시에 측정된 최고 구속이 93마일이었다. 이에 한국 야구팬들은 150km를 웃돌던 LG 시절에 비해 구속이 많이 떨어져서 국내에서도 활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이상훈은 국내 복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실 전광판에 150km를 기록하더니, 해당 시즌에 최고 153km의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구속 뻥튀기설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09년 WBC 이후였다. 국내 투수들이 대회 내내 한국에서보다 훨씬 빠른 구속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야구팬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WBC에 출전한 국가대표 투수들이 국내에 돌아오자마자 WBC에서 기록한 최고 구속을 그대로 찍었다.

 

WBC 때 최고구속 152km를 기록한 윤석민은 두산과의 잠실 개막전에서 152km

 

WBC 때 최고구속 151km를 기록한 류현진은 SK와의 문학 개막전에서 151km

 

WBC 때 최고구속 152km를 기록한 정현욱은 LG와의 대구 개막전에서 152km, 다음날에는 153km

 

WBC에서 여러 차례 등판 해 올린 최고 구속을 어떻게 국내에 복귀하자마자 단 한 경기만에 달성할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피로와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단 WBC에서 최고구속 150km를 기록한 봉중근은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147km, 그 다음 경기에서는 148km를 기록하여 미국에서만큼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메이저리그가 구속을 뻥튀기한다는 이론은 잘못되었으며, 이러한 잘못된 이론을 악용하여 선동열과 박찬호의 구속차를 무마해보려는 시도는 더 이상 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야구팬들이라면 '종속'과 '볼끝'이라는 용어를 쉽게 접해보았을 것이다. 이 용어들을 사용해 '공이 가볍다, 무겁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일부 올드팬들은 선동열과 박찬호의 비교에서, 구속은 박찬호가 빠르지만 종속과 볼끝이 좋지 않기 때문에 공이 가벼워 선동열이 한 수 위라고 말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까?

 

 

1. 종속의 비교

 

일부 야구팬들의 주장처럼 정말 박찬호은 종속이 좋지 않고 볼이 가벼울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비교할 만한 대상이 있는데 바로 현 일본 최고의 투수 다르빗슈 유. 공의 종속이 좋다는 일본야구, 그 중에서도 최고의 투수인 다르빗슈의 종속이 별로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09년 WBC 결승전에서 보여준 초속과 종속을 비교해보자 (90마일 이상의 공만 체크했다).

 

(출처 : www.brooksbaseball.net)

 

초속    종속

96.0    86.5
99.2    89.3
93.3    84.5
95.1    85.2
96.1    86.3

95.9    87.0
95.8    86.2
93.1    84.0
95.1    85.0
95.7    86.2

96.2    85.9
96.3    86.4
95.6    86.3
93.2    82.6
92.3    81.9

94.5    84.5
92.2    82.9
94.3    84.8
95.1    85.1
92.9    82.7

95.5    85.4
95.2    85.3

 

합계 94.93 - 85.18 = 9.75마일

 

다르빗슈의 초, 종속차는 9.75마일이었다. 그러면 같은 사이트에서 제공한 박찬호가 09년 월드시리즈 양키스 전 초, 종속차도 비교해보자.

 

10/29일 

초속  종속

91.8    84.8

90.8    83.6
91.5    85.7

 

11/1일 

초속  종속

90.9    82.2

91.3    82.9
90.9    84.0
90.0    82.7
91.9    83.3
92.1    84.6

 

11/2일 

초속  종속

90.1    82.7

90.8    83.5
90.9    84.0
93.5    85.6
91.3    83.9
91.1    83.7
90.1    82.4

 

11/4일

초속  종속

91.5   83.1

92.8   84.8
94.1   84.8
91.3   83.1
94.5   87.0
90.6   83.6
90.0   82.1
92.9   85.1
93.3   85.5

 

합계 91.6- 83.94 = 7.66마일

 

박찬호 공의 초, 종속차이는 7.66마일. 오히려 박찬호의 초, 종속차가 더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일반적인 야구팬들의 생각과는 달리 종속은 공의 위력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초속이 비슷하면 종속도 투수와 관계없이 거의 비슷하고, 초속이 빠를수록 초, 종속차이는 커진다. 직구보다 변화구의 초, 종속차가 더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이다. 다르빗슈가 박찬호보다 초, 종속차가 2마일 더 나는것도 다르빗슈의 초속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이다. 최근 KBO 중계에서도 몇몇 방송국이 투수들의 종속을 보여주곤 하는데 이 사실에 정확히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다.

 

일부 올드팬들은 과거의 야구중계에서 초, 종속이 3~4km 차이가 나는 것을 종종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 와서는 사실 중속을 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종속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허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측정방식으로 90마일 이상의 공을 던지면서 초, 종속이 3,4km 밖에 차이나지 않는 투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분명히 구속이 느린데도 치기 힘든 공이 존재하고, 빠르지만 '가벼운' 공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종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전문가들이나 야구 종사자들이 증언하는 종속은 느낌에서 오는 것이지 과학적 의미의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의 속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릴리즈포인트의 비교 

 

우리는 앞서서 종속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허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선동열의 공은 무겁고, 박찬호의 공은 가볍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동열이 릴리즈포인트가 굉장히 앞에 있어서 선동열의 공이 더 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어거지라는 것을 밝히기는 어렵지 않다. 릴리즈포인트는 보통 키와 팔길이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랜디 존슨
 



김광현


팀 린스컴 



선동열


결국 선동열의 공이 무겁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에서 온 착각이다. 선동열의 공을 잘 치지 못했던 한국 타자들, 반면 박찬호의 공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들이 홈런으로 연결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선동열의 공은 무겁고 박찬호의 공은 가벼운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 : 
선동열 선발시절 한국야구의 수준  http://www.subalki.com/55

사실 선동열의 선발시절 공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마무리 시절 직구는 KBO와 NPB에서는 특급이었지만 선발시절 직구는 그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리로 그렇게 압도적인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른 글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저작자 표시

선동열이 프로에서 선발로 뛴 시기는 86~91년이다. 92 시즌부터는 전업 마무리로 전향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많은 야구팬들이 이 시기의 한국야구 수준에 대해 오해를 하는데, 심지어 FA, 용병 도입 이후의 한국야구 수준보다 80년대의 수준이 더 높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과연 선동열의 선발시절이었던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야구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82년 세계 야구 선수권으로 보는 당시 한국야구의 수준
 
한국의 프로야구는 1982년에 출범하게 된다. 이것은 1871년에 출범한 미국 프로야구에는 100년 이상, 1936년에 출범한 일본 프로야구에는 4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올드 야구팬들은 80년대 한국의 야구 수준이 일본과 동급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때문인데, 한국은 일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재박의 일명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우승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올드 야구팬들의 생각과는 달리, 82년 세계 야구 선수권의 일본 대표팀은 08년 베이징 올림픽이나 06, 09년 WBC에서의 일본 프로 올스타가 아니었다. 


이들은 일본 사회인 야구선수들로 기업에 소속된, 우리나라로 따지면 실업 야구선수에 해당한다. 그런 팀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겨루었던 것이 바로 82년 한국 야구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일본 사회인 야구 대표팀에게 졌을 때는 '도하 참사'라는 단어가 사용 될 정도의 굴욕이었지만, 82년에는 저런 수준의 일본 대표팀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를 살펴보자.

 


기사 좌측 하단을 보면 이런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선수들은 밤 늦게까지 카지노에서 노는 일도 있었으나 단 한 선수에 대해서만은 '한국을 이기기 위해서 근신하라'면서 문턱에조차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바로 32세의 우완 스즈끼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노련한 피칭을 자랑하고 있다.

 

프로도 밟지 못한 사회인 야구선수 32살 우완 스즈끼가 당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였다. 당시 야구팬의 증언에 따르면 스즈끼는 직구 최고 구속이 140km도 나오지 않는 투수였다고 한다.  다른 일본 선수들은 밤 늦게까지 카지노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국 선수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이런 선수들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2. 80년대 프로야구 선수들의 신체 조건과 파워

 

아래 기사를 보자.


한국인 표준 체격 남자 167cm 몸무게 61kg

 

이것이 81년 한국 남자의 일반적인 체격이었다.

 

야구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프로야구 원년 홈런타자였던 김우열도 키가 170 초반에 불과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는 개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김성한, 김봉연, 이만수 등 8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들의 키가 180cm 를 넘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번부터 9번까지 대부분의 타자들이 홈런을 칠 수 있고, 잠실 중단, 상단에까지 쉽게 공을 날릴 수 있는 중심타자들이 버티고 있었던 21세기의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에 비해 힘에서 많이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21세기 KBO의 주요 타자들을 살펴보면,


키도 180cm 이상은 기본이고 몸무게와 체격도 훨씬 좋다.

(이대호, 김태균의 몸무게가 100kg은 아닐것이다.)

게다가 힘 좋은 용병 타자들까지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홈런 타자들의 체격도 살펴보자.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마크 맥과이어


마크 맥과이어

타격은 결국 힘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타자의 힘은 리그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엔 80년대 한국 야구 타자들의 홈런 순위를 살펴보자.
 

85년



86년


87년


88년


89년


21세기 KBO의 홈런 갯수와 차이가 꽤 많이 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과가 온전히 타자들의 파워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당시의 스트라이크존은 위 아래로 좁고, 양 옆으로 넓은 이른바 '태평양 스트라이크 존' 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타자들이 장타를 생산하기 쉽지 않았던 점도 분명 원인으로 작용한다 (태평양 스트라이크 존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타자들의 홈런 갯수가 현재의 한국 야구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2010년 타자들의 홈런 갯수와 비교해보라.


홈런 갯수뿐만 아니라 
80년대에는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들이 정해져 있었던 반면, 현재는 그 누가 홈런을 쳐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큰 차이다.

 

참고로 박찬호의 전성기였던 00, 01년 NL의 홈런 순위도 보자.


 


비교하는게 민망 할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장명부, 박철순을 통해 살펴보는 80년대 KBO의 수준

 

일본리그에서 뛰다 한국에 온 장명부의 통산 기록을 보면 80년대 KBO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한국에 오기 직전인 82년 일본에서의 성적은 3승 11패 111이닝 4.45였다. 그러나 83년 한국에서는 30승 16패 427.1이닝 2.34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준차이가 이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장명부가 첫 해에 엄청난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특이한 투구폼 때문이었다.



장명부의 투구폼을 살펴보면 키킹과 공이 손을 떠나는 타이밍이 다른 투수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구폼이 한국 타자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무지막지한 이닝 소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83 시즌 이후 그의 성적은 급격히 떨어진다.

 

장명부의 활약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80년대 한국 타자들의 임기응변 능력이 아주 부족했다는 것이다.83 시즌 내내 특이한 투구폼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음 시즌인 84 시즌부터 조금씩 타이밍을 맞추기 시작했다. 선수층이 무척 얇았으며 타자들의 적응력도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22연승을 기록하기도 한 박철순의 마이너리그 기록도 살펴보자


한 때 박철순이 트리플 A에서 메이저리그로 승격되기 직전에 한국으로 왔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박철순의 마이너리그 기록은 더블 A 까지 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처참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간혹 박철순이 마이너리그 시절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며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지 원래 실력은 트리플 A 이상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추신수는 방 2칸 짜리 집에서 동료 커플 2쌍, 부인과 함께 살았으며, 박찬호는 동료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며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박철순의 실패는 실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러한 선수들의 예시로 80년대 KBO의 수준을 짐작 할 수 있다.

 

 

4. MBC 청룡의 수석코치 미즈다니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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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面(정면)대결은 時機尙早(시기상조)

美國(미국) 에이스빼고도 6勝 1敗
日本(일본)서 한물간 선수 韓國(한국)서 활개
엄청난 수준차 ... 세계타이틀매치 遙遠(요원)

날고 뛰고 걷다
「美日올스타戰」 계기로 본 3國실력 간접비교
 

 

설마 이길것까지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야구태평양전쟁」이랄수 있는 미일프로야구 올스타전(11월 1일~9일 일본)에서 일본은 1승6패라는 전적으로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

35년만에 벌어진 미일간에 이 싸움에 미국은 지난 7월5일의 휴스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출전 멤버중  드와이트 구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로저 클레멘스 및 강타자 마이크 슈미트, 조 카터, 데이브 윈필드, 모스비 등이 불참했다.

반면에 일본은 기요하라 가즈히로(淸原) 와타나베 히사노부(渡邊) 구도 기미야스(工藤) 곽태원(郭泰源) 등 저팬시리즈 우승팀 세이부의 전투수력과 요미우리의 괴물투수 에가와(江川) 및 퍼시픽리그 타격 3관왕 오치아이(落合), 히로시마(廣島)의 강타자 야마모토(山本) 등을 망라한 최강팀을 내놓았다. 

(중략)

 

MBC청룡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씨는 "한국선수들의 실력을 수비 타격 주루등으로 나누어 평가한다면 그중 몇몇 선수는 수비나 주루플레이면에서 일본의 1군실력에 버금가지만 타격까지 포함한 전체실력이 1군에 낄만한 선수는 한명도 없다" 단정한다.

한국의 실력은 일본프로야구의 2군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야구는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태여 비교한다면 일본1군은 미국의 트리플A는 커녕 더블A의 좀 잘하는 팀 실력 정도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수준차이라면 결국 프로야구는 그나라의 수준에 맞게 즐기면 되는것이지 축구에서의 월드컵대회같은 세계타이들매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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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의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가 한국야구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기사이다. 결국 미즈다니 코치는 한국 야구와 선수들을 비하한다는 명목으로 퇴출당하게 된다.
 


미일 올스타전의 경기 내용으로 보아 확실히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더블 A 수준에 불과했다. 90년대 이후 일본 타자들의 힘이 증가하고, 미국 내 야구 인기의 하락으로 유망주들이 풋볼, 농구 등으로 전향하여 메이저리그의 수준이 하락한 이후에야 트리플 A 급으로 인정받은 것이 일본의 프로야구이다.

 

위 기사의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메이저리그 팀에서는 많은 선수들이 빠져있었고, 일본은 거의 완벽한 올스타를 준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미일 올스타전에 임하는 미국 선수들과 일본 선수들의 몸상태와 마음가짐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수준 차이는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선수들의 실력을 수비 타격 주루등으로 나누어 평가한다면 그중 몇몇 선수는 수비나 주루플레이면에서 일본의 1군실력에 버금가지만 타격까지 포함한 전체실력이 1군에 낄만한 선수는 한명도 없다"

 

미즈다니의 평가처럼 더블 A 수준에 불과한 일본 야구, 그 일본 야구의 2군 수준이었던 것이 바로 80년대의 한국 프로야구였다.

 

 

5. 91년 한일 슈퍼게임

 

프로리그 출범 이후 완만히 발전하였으나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있던 한국야구. 그런 한국야구에게 굴욕을 안겨주며 급격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대회가 바로 91년 한일 슈퍼게임이다.

 

한일 슈퍼게임은 일본 프로리그의 올스타와 한국의 올스타가 맞붙은 첫번째 대회이기도 했다. 시합은 총 6차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대회 전 한국 야구인들의 예상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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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살 골리앗과 10살 다윗의 대전

  

초특급 박동희의 몸쪽 낮은 직구에 승부를 건다. 

 

2일 낮 12시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91 한일프로아구 슈퍼게임 1차전을 앞둔 한국팀 김응룡 감독의 출사표다.

출범 10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56년 역사의 일본에 비해 분명히 한수 아래다. 그러나 31일 도쿄에 도착한 김감독은 "시속 1백50km 를 넘나드는 박동희의 강속구를 몸쪽으로 뿌리면 일본 타자들도 쉽게 방망이를 맞추지 못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

 

(중략)

 

과연 한국은 이번 6차전 가운데 몇승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견해도 양국간의 실력차이로 6차전 중 1승도 건지기 어려울 것이란 비관론과 2승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양분되어 있다. 비관론을 펴는 쪽의 주장은 한마디로 "한국에는 하나뿐인 선동렬 같은 투수가 일본에는 12개 프로야구팀마다 한두명씩은 있다." 는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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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문가들은 한국야구와 일본야구의 수준차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6차전 중 2승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 낙관론, 선동열 같은 투수가 일본에는 각 팀마다 한 두명 씩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1차전 선발은 요미우리의 에이스 구와타 마쓰미였다. 한국에서는 원래 1차전 선발로 내정되어 있었던 선동열이 발목 부상을 입으면서 박동희가 선발로 등판
 

(출처 : http://blog.naver.com/hongjoone/140018824281)

 

1차전은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여 준 경기였다.

 

구와타 마쓰미의 직구와 포크볼에 한국 타자들은 연신 헛스윙을 하였고, 구와타는 3이닝을 던지고 내려간다. 박동희는 4이닝동안 7피안타 3실점을 한다. 5회 조규제가 등판했지만 홈런 2개를 맞으며 무너진다. 점수차도 점수차지만 경기 내용 자체를 일본 마음대로 조절하는 수준이었다.

 

 

2차전 (한국 2 - 8 일본)

 

1차전 이후 일본의 타선이 조금 달라졌다. 몇몇 주전 선수들이 빠지게 되는데, 1차전처럼 완벽한 올스타가 아니었다.

 

윤학길이 선발로 등판했지만 홈런을 맞으며 강판당했고, 1차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마무리된다.

 

 

3차전 (한국 2 - 5 일본)


일본은 3차전부터 당시 센트럴리그 꼴지팀인 한신 타이거즈 선수들을 주축으로 내보낸다. 한일 슈퍼게임은 양국간의 이벤트 게임이었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송진우가 4타자 연속 삼진을 잡으며 6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한다. 그러나 7회에 동점을 허용하고 구원 투수들이 연이어 점수를 허용하면서 5:2로 패배한다.

 


"최하위팀에도 역부족"

 

 

한신 타이거즈 주축의 팀에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한국 대표팀을 질책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4차전 (한국 7 - 1 일본)


4차전에서 일본은 여전히 부실한 선수 구성이다.

 

한용덕은 6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한다. 뒤이어 등판한 박동희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세이브를 기록한다. 4차전에서야 비로소 첫 승리를 가져가는 한국 대표팀이다.

 

 

그리고 대망의 5차전, 1차전 등판 직전 발목부상을 입었다던 선동열이 선발로 등판한다.


몇몇 야구팬들이 91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동열이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 5차전 등판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5차전에 뛴 일본 멤버들은 오치아이, 다이호를 제외하면 별 볼일 없었다.

 

 

5차전 (한국 8 - 0 일본)



선동열은 선발등판하여 5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으며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한다. 뒤를 이어 나온 송진우 역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한다. 장종훈이 기토를 상대로 장외홈런을 치기도 했다.

 

 

6차전 (한국 1 - 2 일본)
 


6차전에는 사와무라 상 수상자였던 사사오카 신지가 등판하는데, 6차전마저 빼앗기면 한국과 동률이 되어버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6경기 중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2:1로 석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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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91년 한일 슈퍼게임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는 2승 4패였지만, 일본이 한국을 가지고 논 대회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물 안 야구> 깨달음 얻었다
투수 제구력 타자 공격 <한수 아래> 실감
日 에이스 빠진 경기만 2승 거둬 "체면"
 
한국 선발팀이 2승 4패를 기록한 가운데 10일 막을 내린 91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은 <우물 안 개구리> 격이었던 한국프로야구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한국 선발팀은 최악의 가정인 6연패를 면하고 송진우, 한용덕, 이정훈, 장종훈, 김성한 등이 투타에서 맹활약, 3연패 끝에 4,5 차전에서 일본 선발팀을 연파, 한국이 한번쯤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일본 매스컴들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두번의 승리가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번 슈퍼게임을 지켜본 프로야구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중략)
 
한국이 6차전까지의 경기 가운데 일본의 에이스급 선수들이 출전한 1,2차전에서는 3점 이상 내지 못하고 3대8, 2대8로 대패한 반면 에이스급 선수들이 빠진 4,5차전에서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해설가 하일성씨는 "한국 타자들이 평균 시속 138km 대 일본투수들의 공은 칠 수 있었지만 1차전 선발 구와타 같은 평균시속 140km 대 이상 투수들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며 "만약 노모나 사사오카, 가와구치나 이마나카 등이 예정대로 4,5차전에 등판했다면 한국의 승리는 내다보기 힘들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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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이러한 굴욕을 발판으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일본과의 격차를 꽤 많이 줄였다. 올림픽, WBC를 통하여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와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전을 부정하고, 80년대의 야구 수준이 현재보다 높거나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올드팬들의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출처 : 야생야사 http://cafe.naver.com/yakujoa.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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